지난 5월 1일은 1994년 아일톤 세나가 세상을 떠난지 26년이 지난 날이였다. 아일톤 세나, F1의 전설적 인물 중 한 명이자, F1 역사상 가장 강렬한 드라이빙을 선보인 드라이버이며, 브라질의 국민 영웅이다. 그의 26주기를 맞아 그를 되돌아 보고자 한다.
아일톤 세나, 그는 누구인가?
아이르통 세나 다 실바(Ayrton Senna da Silva), 1960년 3월 21일 태어난 그는 지주이자 철물점 사장인 밀톤 다 실바(Milton da Silva)와 네이드 세나 다 실바(Neide Senna da Silva)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일톤 세나는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준 카트를 운전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 청소년기에 그가 첫 출전한 카트 레이스에서 그는 폴 포지션을 잡아내며 잠재력을 표출해내고 있었다. 1977년 남미 카트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시작으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포뮬러 포드1600 챔피언쉽에 출전하며 본격적인 프로 드라이버로서 데뷔하게된다. 포뮬러 포드에서 활동 중이던 때 그의 레이스를 반대하던 부모님의 의견에 고국 브라질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포뮬러 포드2000의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게되어 영국으로 떠난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성씨인 'Senna'의 이름으로 출전한 1982 포뮬러 포드2000 클래스에서 생애 첫 챔피언을 거머쥐었다.
1983년 F3에서의 커리어를 시작으로 이윽고 1984년에는 톨맨팀 소속으로 F1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전설의 시작은 모나코였다. 폭우 속에서 치뤄진 레이스에서 아일톤 세나는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들을 재치고 이내 알랭 프로스트마저 위협적으로 몰아붙였다. 최종 경기 결과는 2위였지만 F1 슈퍼루키의 모습을 지켜본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1985년부터 1987년 시즌까지 활동했던 로터스 팀에서는 이적한 첫 시즌에 치뤘던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는 우천 속에서도 폴 포지션을 차지하고, 패스티스트 랩(Fastest lap)과 첫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는 멕라렌에서 알랭 프로스트와의 치열한 라이벌전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격적이고 날 것(Raw)과 같은 드라이빙 스타일의 세나와 서킷의 교수라고 불리는 정석적인 드라이빙의 프로스트는 멕라렌 내에서도 갈등했고 프로스트가 페라리로 이적한 이후에는 1990 스즈카 그랑프리에서 세나가 폴 포지션 위치에 대한 항의로 프로스트를 고의 추돌하며 챔피언을 확정지으며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1991년 고국 브라질에서 열린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여 3번째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기도 했다.
1993년 멕라렌에서 마지막 시즌을 마무리한 세나는 1994년 윌리엄스에서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였다. 1994년 5월 1일 개최된 이탈리아 산 마리노 그랑프리 7번째 랩 탐부렐로 코너에서 그의 윌리엄스 머신은 원인 불명의 차량 고장으로 307km/h의 속도로 튕겨져나갔고 방호벽에 부딪혔다. 이날 열린 산 마리노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도 심텍 레이싱의 롤란드 라첸베르거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세나는 경기에서 우승할 경우 그를 위해 오스트리아 국기를 흔들 예정이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브라질 국적 항공사였던 바리그 소속 여객기가 운구하였다. 브라질에서는 세나의 사망 이후 3일의 국가 추모 기간을 선포했다. 그의 장례에는 300만이 넘는 브라질 시민들과 차량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브라질 국기가 관을 감싸는 최고의 영예 속에 상파울루 무롬비 공원 묘지에 묻혔다. 아일톤 세나와 롤랜드 라첸베르거의 죽음 이후 F1 레이스카 안전에 대한 규정이 대폭 강화되어 300톤의 충격을 견디는 서바이벌 쉘, 경추 부상을 막기 위한 헤드레스트와 HANS 시스템의 도입이 추진되었고, 이후 20년간 서킷에서 즉사 혹은 중상을 드라이버는 없었다.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수식어
Mr.Monaco, Rain Master. 두 별명은 모두 아일톤 세나를 대표하는 수식어이다. 아일톤 세나는 난이도가 높기로 악명이 자자한 모나코 시가지 서킷에서 이루어지는 그랑프리에서 가장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좁은 노폭을 가진 시가지 서킷에 숏 코너부터 롱 코너, 시케인 등 다양한 코너가 있는 모나코 시가지 서킷에서 현역 10시즌 통산 6승을 거머쥘 정도로 세나는 모나코에서 말그대로 날아다닌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미스터 모나코와 비슷한 레인 마스터는 그가 수중전에 강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차량의 그립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있고 그립을 끝까지 사용할 줄 아는 드라이버였다. 이는 수중전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는 경기에서 그는 다른이들 보다 앞서나갔다. 이밖에도 퀼리파잉의 강자, 휠투휠 레이서 등 세나의 별명과 수식어는 다양하다.
아일톤 세나와 그의 자동차(feat.바이크)
전성기를 함께한 머신: 멕라렌 MP4/4
세나의 전성기는 단언컨대 멕라렌에서 MP4/4~MP4/6를 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대 F1에서 가장 뛰어난 머신이 세나와 프로스트라는 뛰어난 드라이버들을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고 이는 멕라렌에게 4번의 컨스트럭터 우승이라는 전례없는 기록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각 차량별 특징은 MP4/4는 V6터보를 얹고 2.5바의 과급압을 주는 엔진을 탑재했었고, MP4/5는 3.5리터 V10 자연흡기, MP4/6에서는 735마력(ps)을 내는 V12 자연흡기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MP4/6로 출전하던 1992년에는 이미 액티브 서스펜션 등 다양한 전자장비를 채택한 머신이 많아져 멕라렌의 머신이 MP4/4 시절의 명성만큼 힘을 쓰지는 못하였다.
개발과정에 참여한 슈퍼카: 혼다 NSX
세나가 멕라렌에 있던 시기는 멕라렌이 혼다 엔진을 사용했고, 버블 경제로 호황을 맞은 일본에서는 다양한 스포츠카와 슈퍼카 개발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이때 혼다에서는 양산차 최초로 알루미늄 모노코크를 적용하고 전자식 스로틀 바디 등 기술력을 모두 담은 슈퍼카를 만들었고, 그 차량의 테스트 과정과 보완 과정에 아일톤 세나가 참여했다. 그 차가 바로 혼다의 NSX(NA1/2)이다. 이때 아일톤 세나가 NSX를 타고 스즈카 서킷을 질주하는 영상은 유튜브에서 지금도 만나 볼 수 있다. 세나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차량 중에도 혼다 NSX가 존재했었던 것을 보면 완성도가 높고 만족스러운 차량이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멕라렌이 바치는 헌정작: 멕라렌 세나
멕라렌은 500대 한정으로 멕라렌 세나를 만들었다. 이는 과거 멕라렌팀에서 4번의 컨스트럭터 우승을 안겨준 아일톤 세나에 대한 경의와 헌정의 의미로 제작된 차량이다. 멕라렌 세나는 1대의 경매차량을 제외하면 499대의 차량이 판매되었고 국내에는 3대의 차량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멕라렌 세나의 판매 수익 중 일부는 세나 재단을 통해 기부 될 예정이다.
세나가 사랑한 바이크: 두카티
아일톤 세나는 사석에서는 바이크 또한 즐겨탔다. 그가 몰았던 수많은 바이크 중 단연 그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바이크는 두카티의 바이크들 이였다. 그가 두카티 851 Desmo를 세차하는 사진이나 851에 올라 웃고있는 사진, 그리고 그의 연인과 두카티 몬스터 900을 타고 시내를 가로지르던 모습 등에서 세나의 두카티 사랑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두카티에서도 916 Senna, 1199 파니갈래 S Senna 등 세나 에디션 모델을 한정 판매하기도 하였다.
브라질의 국민 영웅
아일톤 세나는 사고를 당한 동료 드라이버를 구하기 위해 레이스카가 질주하는 서킷위로 뛰어들 정도로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였다. 또한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주변인들에게도 굉장히 사려깊게 행동했다고 한다. 그는 조국 브라질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달라서 항상 레이스마다 흔드는 모습이 보여지기도 했다. 그는 브라질의 열악한 상황과 그 속에서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빈민층 어린이들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행동에 옮겼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아일톤 세나 재단'을 운영하며 취약계층 아이들의 교육과 지원을 하며 아이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 자선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세나 재단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리드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자선 기금 마련을 위해 F1 선수들을 모아 친선 카트 경기를 열기도 하였다. 사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익명으로 4억 달러 가량(사망 당시 기준)을 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나 재단은 아일톤 세나의 사후 그의 누나인 비비안느 세나가 도맡아 운영하고 있다.
Ayrton Senna da Silva
1960.3.21~1994.5.1
Nada pode me separar do amor de Deus.
(로마서 8장 39절 -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아일톤 세나(1960-1994)의 묘비명
글: 이동현 에디터(yaya7070@naver.com)
출처: F1, Honda, Mcralen, Lotus, Ducati
AyrtonSenna.com, Ayrton Senna Instit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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