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와 페라리의 르망 24시 경주 속 경쟁을 그린 영화 포드 V 페라리가 개봉하였다. 영화 속에선 미국의 자동차 회사 포드가 이탈리아의 명마 페라리를 이겨 나가는 과정을 그리며 통쾌함과 우렁차 배기음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장면을 연출해낸다. 극 중 페라리를 이기기 위해 차량을 개발하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캐롤 셸비라는 인물이 돋보인다. 포드가 페라리를 이기는 데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캐롤 셸비, 실제 역사 속 그는 전설과도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캐롤 셸비는 시골 우편배달원이었던 워렌 홀 셸비(Warren Hall Shelby)와 그의 아내 엘로이즈 사이에서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아주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지 못하고 약한 심장 판막에 문제를 겪었고 이는 평생 삶을 사는데 발목을 잡는 문제로 번지게 된다. 자동차에 대한 관심도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차량을 소유하고 싶었던 캐롤 셸비는 15살이 되는 해에 그의 아버지 자동차였던 문 2개 달린 포드 차량을 운전하고 돌보면서 마치 자신의 차량처럼 여기며 자동차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쏟아낸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동차 운전 기술을 연습하였고 조지아 공과대학에서 항공 공학 프로그램에 대한 수업을 듣지만 세계 2차대전으로 캐롤 셸비는 1942년 육군 항공부대에 입대를 하게 되면서 많은 비행기를 날리게 된다. 세계 2차대전에 참전했으며 그가 공군으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 몰아본 비행기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비행기는 B-26 폭격기라며 포드 V 페라리에서도 언급된다. 그가 B-26 폭격기 조종을 좋아했던 이유는 당시 그 어떤 전투기보다도 직진 속도가 가장 빨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캐롤 셸비는 세계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 제대하게 된다.
군을 제대한 그는 많은 사업을 하게 되지만 속도에 대한 목마름과 자동차에 대한 열정으로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다. 그가 처음 모터스포츠에 참가했던 차량은 친구의 소유였던 MG 사의 T 타입 중 하나인 TC로 1,250cc 직렬 4기통 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차량이다. 이 차량을 끌고 첫 레이스에 출전한 캐롤 셸비는 우승을 차지하며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 차량을 제작하고 미국의 V8기통 엔진을 얹은 차량을 만드는 알라드(Allad) 사의 차량을 타고 경주를 나가기도 했으며 영국의 차량과 미국의 8기통 엔진의 결합은 차후 AC 코브라를 만드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부유한 스포츠맨이었던 존 에드가가 가지고 있던 페라리 857S를 포함한 다양한 스포츠카를 몰았으며 페라리는 물론 마세라티, 재규어, 애스턴 마틴 등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를 운전하는데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캐롤 셸비는 1954년 애스턴 마틴 팀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으며 애스턴 마틴 팀의 차량을 운전하면서 그의 레이싱 인생의 정점을 찍게 된다. 포드 V 페라리 영화에서 가장 첫 장면에 등장하는 르망 24시 레이스가 바로 그 순간이다. 캐롤 셸비는 2,922cc 직렬 6기통 엔진을 앞쪽에 장착하고 5단 수동 변속기와 결합한 DBR1을 타고 1959년 르망 24시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이전부터 실력 있는 유명한 레이서로 여겨졌지만 르망 24시 우승은 그와 팬들에게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의 레이스 인생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듯싶었지만 7세부터 괴롭혀온 심장 질환이 그의 레이스 인생의 앞길을 막았다. 결국 건강상의 문제로 1960년 레이스에서 은퇴하게 되고 새로운 제2의 삶을 준비하게 된다.
캐롤 셸비는 레이서의 인생을 살면서 속도가 빠르다고 하는 웬만한 레이스 카와 스포츠카는 모두 타보았다. 그의 경험상 그런 분류의 차량들은 비싼 가격과 복잡한 구조로 자신이 직접 정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캐롤 셸비는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구조로 자신의 차고에서, 혹은 전 지역의 각 대리점에서 쉽게 수리를 할 수 있으면서도 미국의 V8기통 감성과 유럽의 핸들링과 균형을 제공하는 스포츠카를 만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드림카를 생각하며 차량의 이름을 코브라라고 짓게 된다.
그가 차량에 대해 구상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유럽에서 그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바로 영국의 자동차 회사의 AC 자동차에서 엔진 공급자를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AC 자동차에 알렸고 엔진을 공급받을 포드에도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하자 콜벳과 유럽의 페라리와 경주하고 싶었던 포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며 AC 코브라와 포드의 V8기통 엔진의 결합이 성사된다.
1962년 캐롤 셸비는 자신의 드림카를 만들기 위해 셸비 아메리칸(Shelby american)을 설립하고 포드로부터 4.2L 이후에는 4.7L V8기통 엔진을 준비해 AC 자동차의 차체와 결합하여 코브라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코브라는 전 세계 곳곳의 레이스 트랙과 포드 딜러십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게 된다. 셸비의 코브라는 콜벳을 지배했고 대부분의 레이스를 휩쓸었다.
캐롤 셸비는 미국에서 인정받은 제조업체가 되고 활동 범위를 페라리와 같은 세계적인 제조사들을 제치기 위한 방안을 구상하게 된다. 그렇게 데이토나와 GT 챔피언십에 출전하게 되었고 경기에 맞는 차량과 최고 성능을 내기 위해서 공기역학적 구조를 고려한 코브라 쿠페를 내놓게 된다. 코브라 쿠페는 데이토나 레이싱에서 처음으로 선보였고 당시 기자들은 코브라 쿠페를 데이토나 쿠페라고 부르면서 데이토나 쿠페로 더욱 유명해졌다. 캐롤 셸비의 노력의 결과로 GT 챔피언십에서 데이토나 쿠페로 페라리를 이겼고 캐롤 셸비와 셸비 아메리칸은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머스탱과 함께 GT350과 같은 셸비 마크를 장착한 디비전 모델이 함께 출시한다. 1965년 포드와 셸비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시작은 포드에 고성능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포드는 머슬카의 아이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머스탱을 출시하였는데 강력한 성능의 포니카에 많은 성공적인 판매량을 보여주었지만 고성능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포드는 느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포드 디비전의 총 지배인이었던 리 아이아코카는 셸비에게 승리의 이미지와 고성능을 머스탱에 담아줄 것을 요청했고 셸비는 요청에 따라 1965년 머스탱 GT350을 만들어낸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으로 머스탱에게 고성능 이미지를 입혀주었고 많은 경주에서도 우승하는 결과를 보여주며 지속적으로 포드와 셸비는 디비전 모델을 지금까지도 내놓게 된다.
셸비와 포드의 인연은 GT350을 만들어낸 것보다 페라리를 짓밟기 위해 함께 손을 잡은 포드 GT 레이싱 프로그램이 더욱 유명하다. 이번 포드 V 페라리의 주 이야기이기도 한 일화는 1960년대 초 르망 24시에 관심을 가진 헨리 포드 2세로부터 시작된다. 핸리 포드 2세는 포드가 르망 24시 레이스에 출전하기를 원했고 당시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던 엔초 페라리는 자신의 경영권과 레이스 활동이 보장하는 조건에 한하여 회사를 매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포드가 페라리를 인수하기 위해 포드와 페라리가 만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당시 포드는 레이스를, 페라리는 돈을 원했기에 초기 협상은 순탄하게 진행되었지만 서로에게 가장 중요했던 레이스에서 페라리는 인디애나폴리스 500에서 독단적인 경주를 원했고 포드는 페라리와의 경쟁을 원치 않고 포드 로고로 출전을 원했기에 의견이 부딪혔고 조율이 되지 않자 결국 엔초 페라리는 밥을 먹으러 나가자며 협상을 깨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당시 포드는 페라리 공장에 대한 감사와 법률 협상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어 협상을 성공시키려 했지만 페라리의 매몰찬 거절에 헨리 포드 2세는 격분했고 이에 페라리를 누르겠다며 그나마 가장 승산이 있고 주목받을 수 있으며 페라리가 석권하고 있던 르망 24시에서 페라리를 제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포드 GT 레이싱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그 중심에는 유명 레이서이자 엔지니어였던 캐롤 셸비가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캐롤 셸비는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페라리를 이길 수 있는 차량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첫 번째 GT40인 MK1을 만들어낸다. 4.7L V8기통 엔진을 가운데 얹은 MK1은 첫 번째 르망 경주에서는 기대와 다르게 완주조차 실패하여 처참한 결과를 안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포드는 페라리를 이기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고 단점을 개선하여 1966년 6월 7.0L V8기통 엔진을 장착한 MK2 머신으로 다시 르망 24시에 출전하게 된다. 그 결과 1, 2, 3위로 페라리를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하며 레이싱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된다. 당시 3대의 GT40이 나란히 결승선을 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는 충격을 주었다.
그가 르망 24시에서 우승하고 많은 차량을 몰았던 그의 과거 경험과 자동차를 만들어온 노하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MK2 이후로도 포드 GT40에 대한 개발을 이어나가며 포드와 미국 모터스포츠 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1968년 포드가 셸비의 생산을 도맡은 이후로 셸비 아메리칸이 상상하고 있던 차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1970년 캐롤 셸비는 레이싱과 자동차에서 은퇴를 하며 손을 땐다. 하지만 그는 사업적인 면에서는 은퇴를 하지 않았다. 운영해왔던 굿이어 타이어 배급사를 확장하여 더 많은 타이어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다양한 차량에 장착할 수 있는 휠을 만들어 셸비 휠 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칠리를 굉장히 좋아했던 캐롤 셸비는 1967년 텍사스 터링구아에서 칠리 요리 대회를 만들었으며 자신만의 칠리 믹스를 상품화하여 판매하여 전국적으로 성공적인 반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포드에서 캐롤 셸비와 함께 했던 리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로 이직한 후 무너져가던 크라이슬러에 새 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그때 닷지에 강력한 퍼포먼스를 부여하고 싶었던 리 아이아코카는 캐롤 셸비에게 한 번 더 도움을 요청하고 캐롤 셸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1983년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셸비 퍼포먼스 센터에서 차량을 디자인하고 엔지니어링 하게 된다. 캐롤 셸비는 주로 터보차저를 이용하여 차량의 성능을 높이는 것을 연구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셸비 닷지 차저에는 터보차저가 장착되어 있었다.
셸비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아끼지 않고 자선사업에도 사용하였다. 심장 이식 수혜자였던 캐롤 셸비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어린이들을 돕고자 하였고 1991년 캐롤 셸비 재단을 만들어 자선 사업을 해나갔다. 설립 이후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직면한 수많은 아이들을 돕고 소아과 병원들에 기부를 했다.
2005년에는 레트로 스타일의 머스탱이 부활하고 포드는 셸비의 이름을 붙여 머스탱을 디비전 하기 시작했다. 1965년 머스탱을 고성능으로 만든 것과 같이 차량을 꾸며나갔으며 강력한 머스탱으로 셸비 머스탱의 복귀를 알렸다. 당시 셸비 머스탱의 부활은 1호차가 경매로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등 소비자의 니즈에 맞게 충족 시켜주었다.
아쉽게도 미국 자동차 산업과 모터스포츠의 전설과도 같았던 캐롤 셸비는 2012년 5월 10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모터스포츠와 자동차 매니아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캐롤 셸비는 세상을 떠났고 셸비 아메리칸이 아닌 포드 퍼포먼스의 셸비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지만 셸비는 여전히 포드와 함께 지속적인 디비전 모델을 내놓고 있다. 현재 새로운 신형 머스탱으로 총 6가지의 디비전 모델을 제공하고 포드 F-1550 픽업트럭을 이용한 고성능 디비전도 진행하면서 모델 범위를 넓혔다.
미국의 자동차 역사 속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인 캐롤 셸비, 그가 만든 자동차는 단순히 빠르기만을 위한 자동차가 아닌 누군가에겐 꿈을 주었고 누군가에겐 명성을 안겨줄 레이스 카였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의 정신을 계승한 셸비 아메리칸이 남아있었다면 그 어떤 튜닝 회사보다 잘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글: 이기범 에디터(lgb03@naver.com)
사진: Shelby
카테고리: 자동차 역사 이야기
©오토모빌매거진.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댓글 영역